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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중국근현대사

[역사]신문화운동과 5·4운동

중화민국기(오성기)

신해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은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필요했다. 천두슈는 이러한 상황에서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유교적 가치 체계를 부정하고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고자 했다(신문화운동). 그는 1915년 『청년잡지』(이듬해 신청년』으로 개명했다)를 창간했는데, 이것이 '신문화운동'의 시발점이되었다. 신청년 그룹은 『신청년』을 통해 '민주와 과학'을 외치며 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수많은 지식인들의 글을 『신청년』에 기고하여 신문화운동의 장을 만들었다. 

 

잡지 『신청년』 

1910년대 중국에는 다양한 사상이 소개되었다(그 중 하나가 공산주의이다). 이 시기의 새 사상을 이끈 곳은 베이징대학이었다. 1916년 차이위안페이가 베이징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곳에 자유주의를 도입하고 천두슈를 문과대학장으로 초빙했다. 천두슈는 『신청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대학에는 후스와 리다자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속속 모여 들어 신문화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차이위안페이

베이징정부는 공문과 신문기사 등에 전통적인 문어체 문장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신청년 그룹은 이에 반발하여 실용문과 문학의 도구로서 일상어를 포함한 백화문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유학의 도리를 담고 있던 문학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문학혁명'으로 불리워졌다. 5·4운동을 거치면서 백화문 사용 추세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920년 베이징정부는 전국의 학교 교과서에 백화문을 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두슈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중국은 승전국으로 강화회의에 참가했다(파리강화회의). 중국대표단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산둥문제의 시발점이다)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한 원칙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은 돤치루이 정권이 21개조 요구를 승인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회의 중 제출하며 중국의 요구를 반대했다. 영국·프랑스는 일본과 상호간 아시아에서의 이권을 승인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강화회의의 형세는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 결과 산둥의 이권은 일본이 가지게 되었다.

 

                    톈안먼광장에서 시위중인 시민들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내에 실망감이 팽배했다. 결국 1919년 5월 1일 각 대학 대표들이 베이징대학에 모여 학생 대회를 개최하고, 5월 4일에 톈안먼 앞에 결집해 파리강화회의 조인 거부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5·4운동). 운동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교통총장 차오루린의 저택을 습격했다. 습격이유는 파리강화회의에서 21개조 요구의 유효성 증명하기 위해 일본이 제출한 돤치루이 정권의 동의서에 차오루린의 서명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학생들은 차오루린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있던 주일 공사관 장쭝샹을 구타했다.

 

학생들은 민족의 위기를 대중들에게 알리며 국산품 애용, 파리강화조약 조인 거부, 매국노 징벌을 베이징정부에 요구했다. 베이징정부는 이 사건의 배후에 베이징대학의 학장인 차이위안페이가 있다고 의심했다. 결국 차이위안페이는 정부의 압력에 의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베이징을 떠났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학생들은 운동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운동은 전국각지로 확산되어 상하이에서는 학생(수업거부), 상인(상점의 영업정지), 노동자(파업)가 연합한 운동이 일어났다(삼파투쟁). 상하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외국자본 계열의 공장들이 완전히 멈춰섰기 때문에 열강들도 이 운동을 수습하라고 베이징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사태의 악화를 막기위해 6월 10일 매국행위를 한 고위관리들을 파면했다. 하지만 이들을 파면했다고해서 산둥 문제가 해결된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다음 목표는 파리강화조약 조인 거부로 이어졌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파리에 있는 중국대표단이 판단해 조약 조인 여부를 결정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파리의 중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은 중국대표단의 숙소를 포위해 조약 조인을 거부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파리의 중국대표단은 파리강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신문화운동은 전통문화에 이의를 제기하며 신사상에 입각해 '신문화'를 건립하고자 한 계몽운동이었다. 5·4운동은 민족의 위기에 저항한 애국주의운동이었다. 언뜻 보면 별개의 운동이지만 양자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전개되었다. 오늘날도 중국에서는 '5·4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5·4운동 전후에 전개된 신문화운동의 정신을 포함한 것이다. 

 

후스

신청년 그룹 중 후스는 신문화운동 초창기부터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반면 5·4운동 이후 천두슈리다자오는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다. 1919년 후스는 주의(이론)를 논하는 것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리다자오는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주의(이론)를 활용하여 사회혁명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문제와 주의' 논쟁). 이는 신청년 그룹 내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간의 이념 대립이었다. 대립의 결과 『신청년』은 마르크스주의 특집호를 발간해 공산당의 기관지의 성격으로 전환했다. 결국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고, 『신청년』의 대표인 천두슈가 공산당의 초대 당서기에 선출되었다. 반면 『신청년』과 결별한 후스는 1922년 『노력주보』를 창간하여 자유주의운동을 전개했다.

 

청말 행정구역 및 주요도시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