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신정에 따라 청나라 내 교통의 요지에 철도망을 확대할 필요가 생겼다. 청나라는 의회제도에 부합하는 근대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철도망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911년 5월 청조정(황족내각)은 전국의 철도를 국유화하여 경영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철도 건설을 민간 자본을 통해 진행하고 있던 지방의 신사들은 철도 국유화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대해 후난, 후베이, 쓰촨, 광둥 등에서 자의국을 중심으로 철도 국유화 반대운동(보로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철도 국유화 반대운동 뒤에는 혁명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쓰촨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혁명파는 쑹자오런의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중심으로 우창에서 무장봉기 준비에 들어갔다.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는 지역단체와 함께 신군에게 접근하여 동지를 늘려갔다. 결국 1911년 10월 우창의 신군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우창봉기). 11일에는 반란군이 총독아문을 점령했고, 이어 주변 지역의 신군들이 가담했다. 그들은 주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청이 파견한 신군의 부대장 리위안홍을 후베이성의 도독으로 결정하고 군정부를 수립했다(후베이 군정부). 그리고 후베이 군정부는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우창봉기 이후 청조정은 내각 총리대신을 위안스카이로 교체하고, 그에게 혁명군 진압을 위한 권력을 위임했다.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북양군을 통솔할 수 있는 위안스카이의 협력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후베이성의 독립선언에 대응하여 청은 진압에 나섰지만 연이어 혁명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산시성에 이어 화중·화남을 중심으로 13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상하이로 대표를 파견하고 새 정부 구상을 설계했다. 그 과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공표하고, 1911년 12월 2일 혁명군이 난징을 점령하자 대표들은 난징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각 성 대표에 의한 새 정부 구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12월 25일 영국에서 쑨원이 귀국하자, 성 대표들은 29일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했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난징을 수도로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신해혁명). 쑨원은 중화민국의 국기로 한족 국가의 재건을 의미했던 18성기를 채택하지 않고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장족의 오족연합에 의한 공화제, 즉 오족공화를 상징하는 오색기를 채택했다. 중화민국의 국민으로 '한족'이 아니라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장족'이 설정되었다는 것은 혁명파의 '반만혁명론'보다 입헌파의 '대민족주의'가 중화민국의 지향점으로 선택된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북지역은 여전히 청나라가 통치를 하고 있었고, 열강들 또한 청나라를 공식국가로 승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화민국은 완전한 형태의 국가가 아니었다.
한편, 1911년 12월부터 개시된 남북의화(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청조정간의 협상)로 혁명군과 청조정간에 정전협상이 이루어졌다. 청조정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는 협상을 통해 공화제를 찬성하는쪽으로 국면을 수습하려했다. 결국 1912년 1월 22일 쑨원은 청조 황제(선통제/푸이)의 퇴위 조서가 접수되면, 즉각 자신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위안스카이는 이것을 받아들여 청조 황제의 퇴위를 모색하였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로부터 청조 황실의 우대 조건을 약속 받은 청나라 황제(선통제/푸이)는 퇴위하였다. 청조 황실의 우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는 실권을 상실하지만 칭호는 남겨둔다" 둘째, "중화민국이 매년 400만 위안을 지출해 황제의 생활을 보호한다" 셋째, "황제는 자금성에 계속 거주해도 좋으며 중화민국군이 호위를 담당하되, 환관을 새로 채용하는 것을 금지한다"이다. 타협안의 내용대로 2월 15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계승하여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신해혁명은 중화민국 수립이라는 중국역사에서 수천 년에 걸친 황제체제에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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