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운동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인의 생활권을 서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반외세·반기독교 민중운동이다. 중국 내지에서 기독교 포교가 공인된 이후 반외세운동이 형성되더니 1890년대에는 북중국에서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특히 1897년 독일의 산둥성 교주만(칭다오) 점령은 청나라 민중의 반외세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1898년 산둥성에서 독일 선교사가 민간의 사원을 파괴하고 교회를 설립한 것이 발단이 되어, 민중이 봉기했다(의화단운동). 초기 반기독교운동은 비밀결사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1899년부터는 관리의 지도를 받은 향촌의 치안조직(단련)이 가담하여 '의화단'이라는 호칭으로 활동했다. 의화단은 부청멸양(청을 도와 서양을 멸한다)의 슬로건을 내걸고 기독교도를 살해하고 교회를 파괴했다.
1899년 말 산둥성 순무로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서양 측에 협조해 의화단을 진압한 결과, 1900년 의화단은 위안스카이의 진압을 피해 산둥성에서 북상해 베이징이 있는 즈리성으로 진입했다. 의화단은 베이징과 연결된 철로와 전신을 파괴하고 베이징과 톈진으로 진입해 시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이유는 서태후(당시 청조정의 실권자이다)가 의화단에 대한 유화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무술정변 이후 황제(광서제)를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열강의 반대로 실패한 것이 유화책 채택의 이유였다. 뿐만아니라 청조정은 의화단이 베이징 공사관을 포위하자 열강에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의화단전쟁).
청조정의 선전포고에 대응하여 8개국 연합군(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은 톈진을 진압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연합군에 대응할 힘이 없던 서태후와 조정은 시안으로 도망가 베이징은 결국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그 결과 1901년 청나라와 열강 사이에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4억 5000만냥의 배상금 지불, 외무부 설치(총리아문 폐지), 베이징 공사관 설정 및 외국군 주둔, 톈진 입구에 위치한 대고포대의 철거, 베이징에서 산하이관에 이르는 각 요지에 외국군 주둔이 허용이 그 내용이었다. 또한 배외 관리가 숙청되었으며, 민간의 배외 결사가 금지되었다.
의화단전쟁은 베이징 주변을 중심으로 화북 지역에만 한정된 전쟁이었다. 산둥성 순무인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중국 동남지역의 총독들은 열강에 대한 청의 선전포고에 따르지 않았다. 또한 의화단을 반란민으로 규정하고 열강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다(동남호보). 이는 지방총독이 독단적으로 열강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것으로, 청말 각 지방(주로 성 단위로 나뉘었다)이 청 조정에서 분리되어가는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의화단전쟁 기간에 만주를 점령했다. 하지만 신축조약을 체결하고 나서도 철병하지 않고 있었다. 1902년 1월 30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일본은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중국과 인도에서 영국의 권익을, 영국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본의 권익을 승인했다. 러시아는 영일동맹의 체결에 따라 만주에서 철병할 것을 청에 약속했고, 1902년 4월 8일에 청과 러시아 사이에 만주반환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철병을 하지 않고 1903년에 청에게 철병 조건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는 반러시아 운동(거아운동)이 일어났으며,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점령에 반발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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