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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중국근현대사

[역사]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

청나라기(황룡기)

1894년~1895년에 전개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역사의 하나의 전환점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 근대국가로 발전했다. 일본은 청의 타이완을 침공하고 이듬해 정한론(조선을 공격하여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어야한다는 논리)을 내세우며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강화도조약, 1876). 이후 조선에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사개입을 통해 조선의 내정간섭을 실시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법상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명분으로 청나라에 대항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의 요청을 받은 청이 출병했다. 톈진조약에 근거해 일본에도 이 사실을 통지했기 때문에 일본도 출병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고 조선은 양국 군대에게 철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개혁 추진을 명분으로 청군을 의도적으로 공격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 국면은 일본에게 유리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내고 중국영토인 랴오둥반도와 웨이하이웨이까지 점령했다. 1895년 3월 일본의 우세 속에서 이홍장(청나라 고위관리)과 이토 히로부미(일본 고위관리)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자주독립, 배상금 2억냥, 랴오둥·타이완·펑후제도의 할양, 개항장 확대, 개항장 내 공장경영권 인정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895년 4월 러시아·프랑스·독일 세나라는 청나라에서의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고자 시모노세키 조약 내용에 대한 간섭(삼국간섭)을 진행했다. 일본은 이를 수락해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는 대신 청으로부터 반환금 3천만냥을 받았다.

 

청말 행정구역 및 주요도시

시모노세키조약에 입각한 청나라의 영토분할은 최혜국조약에 따라 다른 열강의 청나라내 경제적 침탈을 야기하고 중국의 반식민화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1897년 독일은 교주만(칭다오)을 조차했다. 뒤이어 러시아가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고 만주를 그 세력범위로 삼았다. 이에 영국은 웨이하이웨이를 조차하고 양쯔강유역을 세력범위로 삼고, 홍콩의 주룽반도를 99년 조차했다. 프랑스는 광저우만을 조차하고 식민지 베트남에 인접한 중국 서남부지역을 세력범위로 삼았다. 청나라가 열강들에 의해 나뉘어 질지도 모른다는 '분할의 위기'가 엄습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에 대해 문호개방을 선언하고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 중지를 제창했다.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