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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중국근현대사

[역사]쑨원의 혁명운동과 중국동맹회

청나라기(청룡기)

1894~1895년에 전개된 청일전쟁의 패배는 청나라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는 정치적 변화의식과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변법자강운동으로 알려진 개혁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제 국가를 건립하려는 혁명운동이 시작되었다. 혁명운동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쑨원이었다.

 

쑨원

 

광둥성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청년기에 하와이와 홍콩에서 서구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혁명운동을 시작하기위해 1894년 흥중회를 조직하여 혁명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그의 혁명방법은 두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반만혁명(만주족과 청나라를 배제하고 혁명을 이루자는 뜻이다)이고, 둘째는 변경혁명이다. 이는 해외화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현지에서 혁명인원을 모집해 변경지역(광둥과 광시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혁명을 추진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무장혁명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05년은 중국동맹회가 성립했다는 점에서 중국혁명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쑨원은 무장혁명 실패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흥중회, 화흥회(쑹자오런, 황싱이 주도), 광복회(차이위안페이가 주도) 등의 혁명집단을 통합하여 중국동맹회를 조직했다. 중국동맹회의 성립은 중국혁명운동이 전국적인 조직의 지도 아래 추진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1905년 11월에는 기관지로 『민보』를 창간해 선전기능을 담당하게 했다. 『민보』를 통해 쑨원은 중국도 유럽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 의해 진화해야 함을 강조했다(삼민주의). 『민보』는 입헌군주제 국가를 지향하는 량치차오의 『신민총보』에 대립하며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1906년에는 중국동맹회 혁명방략』을 제정하여 혁명운동의 기본방향을 군법(군대에 의한 통치)⇒약법(당에 의한 통치)⇒헌법(헌법에 의한 통치)으로 규정했다.

 

                                             『민보』

1906년 일본에서 추방당한 쑨원은 베트남에서 활동하며 변경혁명을 주도했지만 이 또한 모두 실패했다. 쑨원이 일본을 떠난 이후 중국동맹회 본부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민보』 역시 1908년 10월 폐간되었다. 중국동맹회에서 쑨원의 지도력은 한계에 달았다. 쑨원이 주도한 변경혁명의 실패와 여기서 비롯한 혁명방법에 대한 의견차이는 중국동맹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쑨원은 마지막까지 해외화교로부터 받은 자금을 변경지역의 혁명에 쏟아부으려 했지만, 창장강 유역에서 혁명을 일으켜 북벌을 해야한다는 그룹과 베이징에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191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쑹자오런이 주도했다)가 성립되었다. 쑨원의 지도력과 변경혁명론에 반발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는 사실상 본부가 와해된 중국동맹회를 재건한 것으로, 이후 후베이의 혁명단체와 연계해 신해혁명의 시작점이 된 우창봉기를 이끌었다.

 

 

청말 행정구역 및 주요도시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