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법자강운동은 청일전쟁 직후 중국 분할의 위기 속에서 이를 극복하려는 신사층의 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양무운동의 실패를 비판하며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참고로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한다.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890년, 캉유웨이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서양학을 절충하여 『신학위경고』, 『공자게제고』를 저술하여 볍법자강운동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했다.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1895년) 그는 중앙(베이징)에 진출하여 황제(광서제)와 접근할 통로를 확보한 뒤, 강학회를 조직하여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한편, 지방에서는 학회를 설립하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개혁을 지지하는 관료와 신사를 결집했다. 량치차오와 황쭌센 등이 상하이에서 창간한 잡지인 『시무보』는 변볍자강운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잡지로 청나라 지식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수파 관료들은 캉유웨이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지만, 청일전쟁의 참패에 따른 정치적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1897년 독일의 산둥성 교주만(칭다오) 점령에 분할의 위기를 느낀 광서제는 1898년 1월 24일 캉유웨이를 불러내 의견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캉유웨이는 급진적인 근대화개혁을 주장하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당시 그의 개혁안에는 행정기구(제도국) 설치와 근대적 법제의 정비, 근대 상공업의 육성, 과거제 개혁, 경사대학당 설립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의 개혁 시도는 보수파 실권자 중 한명인 공친왕이 사망하자 빛을 보기 시작했다. 6월11일 광서제는 "국시를 명확히 정한다"라고 하는 조칙을 내리고 캉유웨이를 비롯한 관료를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이른바 무술변법의 시작이다. 9월 21일까지 103일 동안 급진적 개혁안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제도국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두고 그곳에 정치권력을 집중하는 개혁은 보수파 관료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 캉유웨이의 개혁안은 보수적인 관료층이나 황족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개혁에 대한 불만은 광서제에게 정무를 위임하고 있던 서태후 아래로 집결했다. 결국 서태후는 다시 정무에 관여하기로 하고,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관료들을 파면했다. 뿐만아니라 위안스카이의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무술정변) 광서제를 연금하고,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하던 관리 6명(무술6군자)을 처형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유폐된 광서제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서태후 일당에 반대하는 보황당을 조직해(보황파)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이렇게 변법자강운동은 끝났지만, 개혁의 일부 내용이 이후 채용되어 운동의 의미는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설립된 경사대학당은 폐지되지 않고 베이징대학으로 발전하였다.
# 참고자료
가와시마 신, 「중국근현대사2」, 삼천리, 2013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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