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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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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위안스카이와 베이징정부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직위를 계승했다. 이때 쑨원은 임시정부를 난징에 둘것, 위안스카이가 난징에서 대총통 직위에 취임할 것, 임시약법(헌법의 역할을 대신했다)을 준수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임시대총통 취임식을 베이징에서 가지고, 중앙정부를 베이징에 두었다(베이징정부). 이튿날 11일에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기 위해 임시 참의원(혁명파)은 임시약법을 제정했다. 임시약법에서는 대총통의 권한이 약화되고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또한 행정수반으로서 국무총리직을 신설했다. 하지만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점은 이후 중화민국 정치에 혼란을 초래했다. 한편,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정당과 국회을 이용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뿐이었다. 쑨원과 쑹자오런을 주도로 중..
[역사]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광서신정에 따라 청나라 내 교통의 요지에 철도망을 확대할 필요가 생겼다. 청나라는 의회제도에 부합하는 근대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철도망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911년 5월 청조정(황족내각)은 전국의 철도를 국유화하여 경영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철도 건설을 민간 자본을 통해 진행하고 있던 지방의 신사들은 철도 국유화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대해 후난, 후베이, 쓰촨, 광둥 등에서 자의국을 중심으로 철도 국유화 반대운동(보로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철도 국유화 반대운동 뒤에는 혁명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쓰촨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혁명파는 쑹자오런의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중심으로 우창에서 무장봉기 준비에 들어갔다.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는 지역단체와 함께 신군에게..